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인간 그 자체다. 인간이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지배한다.
우리는 언어가 의식을 조정할 수 있음을 간과한다. 언어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고 행동도 바뀐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있고 또 만들어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정보를 가진 외부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기준이 있는데 이를 프레임이라 부른다.
프레임은 창문, 액자의 틀, 혹은 안경테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다. 그런데 이 '프레임'은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현실세계에서 프레임이 가장 많이 활용되는 분야는 정치이다.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세계적인 인지언어학자인 미국 UC버클리대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1941~ )는 2004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에서 프레임 전쟁을 처음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2006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2006년 한국어판 서문을 살펴보자.
“왜 서민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와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 정당에 투표할까? 서민들이 보수 정당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사실’을 알고 이해하기만 하면 돌아설 것이라고 진보 진영은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혹은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체계와 그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언어와 ‘프레임’에 근거하여 정치와 후보자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익과는 반대로 투표하는 것이다. 그들을 투표소에 들어가게 하는 동기는 바로 그들의 가치 – 보수주의자의 경우에는 엄격한 권위주의적 가치 – 이다. 프레임, 곧 생각의 틀을 바꿔라.”
말장난 같지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코끼리’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부제가 보여주듯 미국 민주당의 대선패배 원인을 분석하여, 보수진영이 장악한 프레임의 헤게모니를 전복시킬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회의 담론에서 '코끼리'가 주제가 되고 있고, 나는 코끼리에 대한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다. 코끼리가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서 모든 담론이 코끼리를 중심으로 찬성, 반대의 입장을 가지게 되면 내가 원하는 얘기는 할 수 없다. 이때는 아예 코끼리를 언급조차 하지 않고 다른 주제를 꺼내야 한다. 이것이 프레임을 전환하는 것이다.
미국 프레임 전쟁의 예
1) 미국 보수 진영의 프랭크 런츠(Frank Luntz)는 '보수 진영이 쓰지 말아야 할 14개의 단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런츠는 14개의 단어들이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진보적 프레임을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미등록 이주 노동자(undocumented workers)'에서 노동자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진보적 시각을 자연스럽게 유발한다. 대신 '불법체류자(illegal alien)'라는 말을 쓰라고 제안한다. 불법체류자라는 단어를 쓰면 국경을 몰래 넘어온 사람을 떠올리게 되고, 국경을 강화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생각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는 것이다.
2) 미국의 보수 진영은 이라크 침공을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명명하고, 진보 진영은 '점령'이라고 해석하였다.
3) 죽은 후에야 수령할 수 있는 보험이 '사망보험(death insurance)'에서 '생명보험(life insurance)'로 바뀐 것도 같은 사례다.
4) 1992년 당시 대통령인 공화당의 아버지 부시는 재선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재임 기간 중에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어 국민의 지지율이 90%에 달해 대통령 연임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경쟁자인 민주당의 빌 클린턴은 미국의 작은 주 아칸사 주지사 출신으로, 경쟁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클린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구호로 부시 행정부의 경제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결과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그의 구호 "It's the ECONOMY, stupid"는 미국 선거 역사상 가장 멋진 구호로 평가받고 있으며, 선거를 진보가 주도하는 담론으로 바꾼 성공적인 사례로 일컬어진다.
한국 프레임 전쟁의 예
1) 선거 역시 말과 글 다시 말해 언어가 핵심이다. 특정 정치세력이 선거에 이기기 위해 ‘어떤 생각의 틀’ 다시 말해 프레임을 사용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군정종식 △정권교체 △지역주의 타파 △3김정치 청산 등 역대 선거를 휩쓸었던 프레임 중에는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2)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부동산 규제책이었던 종합부동산세를 ‘세금폭탄’이라고 규정한 것은 프레임의 위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떻게 방어해도 여론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종부세 과세 대상은 인구의 2%에 불과했지만 반대 여론은 30%를 넘었다.
'세금폭탄(tax bomb)'은 '세금 구제(tax relief)'를 참조해 한국의 보수가 만들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나익주,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 거룩한 느낌마저 주는 '세금 구제'는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뒤 개인소득세 최고 세율을 70%에서 28%로, 법인세율을 48%에서 34%로 크게 내리면서 '세금 인하(tax cut)' 대신 사용하기 시작했다.
3) 2017년 4월 23일 일요일 오후 8시 지상파 3사에서 대선 토론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당시 국민의당 대선후보 안철수는 절대로 언급해서는 안 될 ”코끼리“에 대해 말을 한다. 미래에 대해 토론하자고 하면서 갑자기 문재인 후보에게 "제가 갑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제가 MB아바타입니까?" 라고 물어 그 효과가 더 커졌다.
다음날 온라인 포털의 검색 상위권은 '갑철수'와 'MB아바타'가 차지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MB아바타라는 단어가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안철수의 발언으로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부정하든 긍정하든 아예 해서는 안 되는 말 자체를 본인이 했다는 것에서 정치적 자폭이라는 평이 다수를 차지했다.
정치의 99%는 말과 글이다. 정치의 장에서 행위자들이 어떤 단어와 비유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생산자로써 어떤 프레임을 사용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소비자 혹은 반대 진영에서는 이러한 프레임에 포획당하지 않고 자기 진영에 유리한 프레임 전환에 성공하는 가도 중요하다.
'Issu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울산·경남 메가시티' 좌절에서 초광역경제동맹으로 추진 현황 (0) | 2022.07.14 |
---|---|
GMO 유해 찬반론 (0) | 2022.07.12 |
깨진 유리창 이론과 무질서 및 범죄의 확산 (0) | 2022.07.05 |
과학혁명의 구조와 패러다임의 변화 (0) | 2022.07.05 |
애완견 vs 반려견 (0) | 2022.06.17 |
원자력 발전 vs 재생에너지 (0) | 2022.06.17 |
'진보'라구요. 그럼 IQ가 높겠군요. (0) | 2022.06.16 |
청와대 최고 실세 '퍼스트 독' (0) | 2022.06.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