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숫자는 3이다. 내기나 게임을 할 때도 삼세번을 한다. 셋째 딸은 보지도 않고 시집간다는 말도 있다. 중국인은 8을 행운의 숫자로 여긴다. 8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베이징 올림픽 개막 날짜를 2008년 8월 8일 8시로 정했었다. 일본사람은 7과 8을 좋아한다. 그러나 공통으로 ‘죽을 사(死)’의 4를 싫어한다.
그렇다면 정치인이 좋아하는 숫자는 무엇일까.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는 출마지역의 다수당이 가지는 숫자를 좋아한다. 제1다수당 강세지역은 투표용지에서 1번, 제2다수당 강세지역은 2번을 원한다. 그러나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에서 공천을 받아야 가질 수 있다.
선거는 공정해야 한다. 선거결과에 후보자들의 공약, 후보자의 경력 혹은 정치역량, 그리고 추천한 정당 외에 다른 요소가 영향을 준다면 선거는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 선거에서는 투표용지의 기재순서와 기호가 선거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국의 사례
프랑스의 투표용지는 각 후보자들이 각각 작성한다. 투표방식도 기표하는 방식이 아니다. 투표소에서 후보자들의 투표용지들 중에 원하는 투표용지를 선택하여 봉투에 넣은 다음 투표소의 장으로부터 봉투 1매만을 수령했음을 확인받고 나서 투표함에 투표한다. 즉 기호제도가 없기 때문에 기호의 순서가 문제되지 않는다.
일본은 공직선거법 상 선거인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에 당해 선거의 공직후보자 1인의 성명이나 정당 등의 명칭을 스스로 기재하고 이를 투표함에 넣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호나 기호순서는 문제되지 않는다.
영국과 미국은 기재순서를 무작위로 부여한다. 영국의 경우 성명의 순서에 의한 기재방식을, 미국은 추첨(lottery) 혹은 회전식(rotating) 기재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의 50개 주 중 14개 주가 채택하고 있는 회전식 기재방식은 추첨방식보다는 공정한 기재방식으로 볼 수 있으며, 현재 한국의 교육감 선거에서도 채택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국과 미국에서도 우리와 같이 전국적인 기호나 기호순서는 문제되지 않는다.
한국의 투표용지
그러나 우리나라 공직선거법은 지방선거와 총선, 대선 등 선거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기호를 일률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2006년부터 기초의원선거의 투표용지의 기재순서는 공직선거법(제150조)에 의거 국회 의석수를 기준으로 하여 정당별로 순서가 배정된다.
이러한 의석수 우선 배정방식은 지방선거는 물론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도 일률적으로 적용된다. 따라서 군소정당과 무소속 후보자는 정당소속 후보자 뒤에 기재된다.
지역구자치구·시·군의원선거에서 정당이 같은 선거구에 2명 이상의 후보자를 추천한 경우 그 정당이 추천한 후보자 사이의 투표용지 게재순위는 해당 정당이 정한 순위에 따르되, 정당이 정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관할선거구선거관리위원회에서 추첨하여 결정한다. 이 경우 그 게재순위는 “1-가, 1-나, 1-다” 등으로 표시한다.
지방선거의 경우 1인 7표제로 치러지기 때문에 ‘기호’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유권자들은 대부분 광역단체장 정도가 누가 나왔는지를 인지할 뿐, 나머지 선거의 출마자들에서는 많은 정보를 접하지 못하고 투표장에 가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유권자가 판단하는 후보선택의 기준이 ‘정당’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즉 1번을 선택한 유권자는 다른 종류의 선거 후보자를 선택할 때도 같은 기호를 선택하는 ‘줄 투표’(일관투표, straight ticket voting)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김범수와 서재권의 연구에 따르면 지방선거 기초의원선거에서 투표용지의 기재순서와 기호효과가 득표율에 영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보자의 기재순서가 한 단계 뒤로 갈수록, 약 0.4%의 득표율이 감소하였고, 기호 ‘가’를 배정받은 후보는 무소속 후보에 비해 득표율이 약 10% 더 높게 나왔다.
즉 투표용지 상에 앞선 순위에 기재될수록, 그리고 정당 복수추천에 의해 기호 ‘가’를 배정받은 후보자의 경우, 현직효과·연령·학력과 같은 후보자 특성에 의해 얻는 득표이득을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정당 소속이 아닌 교육감 선거의 경우 기호 표시 없이 후보자의 이름만 위에서 아래 순으로 기재하게 된다. 이 때문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리면 정당공천제도가 없는데도 특정 정당의 후보로 오해해 선거 당락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른바 ‘로또 선거’의 부작용이 표출되면서 2014년 지방선거부터 ‘교호(交互)순번제(순환배열방식)’가 도입됐다.
교호순번제는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이름을 세로가 아닌 가로로 나열하는 방식이다. 또 각 기초의원 선거구마다 후보자 이름을 배열하는 순서가 다른 투표용지가 배부된다. 가령 A구에는 ‘홍길동-임꺽정-장길산’순으로 투표용지에 기재되어 있고, B구에는 ‘임꺽정-장길산-홍길동’, C구에는 ‘장길산-홍길동-임꺽정’ 순으로 기재되는 것이다.
정당의 규모에 따라 정당명부나 지역구선거 출마자의 기호를 전국적으로 일치시키는 현행제도를 유지한다면 특정정당이 의석을 독식하는 ‘묻지마’ 투표가 지속되고, 그 결과 득표율과 의석비율의 왜곡현상은 심화될 것이다.
선거에서 특정정당의 독식현상은 이런 전국적인 통일기호 제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기호제도를 선거구별로 추첨에 의한 방식으로 전환한다면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제의 폐해를 상당 부분 완화시킬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당의 의석수에 의하여 정해지는 현행 기호제도는 지방정치의 중앙정치 예속화를 강화시킨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교육감 선거에서 채택하고 있는 교호순번제(실제적으로 기호가 없다)나 추첨에 의해 기호를 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참고자료
김범수·서재권, “투표용지의 순서효과와 기호효과: 제4회 동시지방선거 기초의원선거 분석”, 『한국정치학회보』 46권 2호(2012), 141~161쪽.
신명순·진영재, 『비교정치』, 박영사(2017), 341~390쪽.
연합뉴스, “‘교육감 투표용지 원형으로 바꾸자’ 개정안 발의”, (2013.10.6).
한정택, “정당일체감과 투표행태”, 『투표행태의 이해』, 전용주 외, 한울아카데미(2009),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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