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60일 지정 생존자"라는 드라마의 첫 시작은 우리나라 입법부 건물인 국회의사당이 폭탄 테러로 인해서 폭발하는 모습이 나오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종전 국가가 아닌 휴전국가이기 때문에 드라마 속 내용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한 북한은 수많은 장사정포를 서울에 겨냥하고 있고 북한의 선전 매체에서는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모습이 자주 나오기도 한다.
따라서 만약 우리나라의 국회 의사당이 테러 또는 전쟁으로 인해서 입법부로써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면 어떤 건물이 국회의사당의 역할을 대신해서 수행하게 될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선 전시 또는 테러 상황에서 현재 국회의사당을 대신할 건물이 어디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사당은 어디였는지, 한국전쟁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어떤 건물들이 사용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사당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 내 중앙청과 중구 태평로의 옛 의사당을 사용했다.
이곳에서 1948년 5월 31일부터 1950년 6월 27일까지 국회의사당으로써 역할을 수행하다가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국회의사당도 여러 지역 여러 건물로 이전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회의사당을 수행했던 건물들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대구광역시에 있는 문화극장에서 1950년 7월 27일부터 1950년 8월 17일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고 북한의 거센 공격으로 낙동강까지 밀렸을 땐 부산광역시에 있는 문화극장에서 1950년 9월 1일부터 1950년 10월 6일까지 역할을 담당하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다시 서울 중앙청을 거쳐 서울시의회(구 부 민관)에서 1950년 10월 7일부터 1951년 1월 3일까지 역할을 담당하였고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되면서 부산에 있는 부산극장에서 1951년 1월 4일부터 1951년 6월 11까지 국회의사당으로써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 부산 정치 파동과 제1차 개헌이라는 역사적인 사건도 발생하게 된다. 이후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임시 국회의사당은 경남도청 무덕전에서 정부 환도 전까지 역할을 담당하였고 정부 환도 이후에는 다시 중앙청에서 국회의사당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국회의사당은 현재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생기기 전 까지 대한공론사, 삼중청(구 해군본부), 서울시의회등을 거치게 되었고 1975년 9월 1일 지금의 국회의사당이 만들어지면서 현재까지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우리나라의 입법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다행스럽게도 테러나 북한의 공격으로 인해서 기능을 상실한 경우는 아직 없다. 하지만 언제든지 북한의 공격과 테러로 인해서 국회의사당의 기능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전시 의사당이라는 대안을 마련해 두고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 전쟁 또는 테러가 발생하고 국회의사당이 피해를 입는다면 현재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우선 수도권 모처에 있는 전쟁용 의사당으로 피난하여 옮기게 된다. 전시용 국회의사당은 위치 자체가 0급 기밀이라서 지금까지 존재 이외의 다른 사안이 알려진 바가 하나도 없다.
국회의원들도 이런 시설이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며 사무처 직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하며 여의도 국회의사당 밑에 지하공간이 상당히 커서 여기로 대피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아예 다른 위치에 별도의 비상용 의사당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2021년 9월 28일 제21대 국회에서 국회법 개정을 통해 세종특별자치시에 국회 분원 의사당을 설치하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서 세종시에 국회 분원으로 세종 의사당을 두고, 국회 세종 의사당 설치와 운영,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을 국회 규칙으로 명시하게 되었고 이르면 2026년 하반기 세종 의사당이 개원 예정이다. 따라서 세종 의사당이 전시 의사당으로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이 공격을 받았을 때 어떤 건물이 임시 국회의사당의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국회의사당이 전쟁 또는 테러로 인해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건물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지 독일 국회의사당을 예시로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독일 국회의사당은 국가 의회 의사당이라고 불리며 베를린에 있는 역사적인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71년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이후 독일 국회의사당의 건설이 계획되었다. 첫 계획은 순조롭지 못하여 통일 이듬해인 1872년 현상설계가 열렸으나 건축되지 못하였습니다만 1882년 다시 열린 현상 설계에서 파울 발롯(Paul Wallot)의 설계안이 채택되었고,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894년에 독일 국회의사당이 완공되었다.
1918년 11월 9일에는 사회 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의원 필립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이 독일 국회의사당의 한 창문에서 공화제를 선포하면서 독일 국회의사당의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부각되었다.
하지만 1933년 발생한 화재로 인해 독일 국회의사당의 본 회의장이 불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돔을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화재는 공산당원의 범행으로 밝혀졌는데, 이를 계기로 히틀러는 독일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고 세력을 확장시키게 된다. 방화 이후 독일 국회의사당은 복구되지 않았고, 맞은편의 크롤 오페라하우스에서 국회를 개최하게 된다.
하지만 이 건물도 2차 대전 때 격전의 한복판에 있었기에 대파되고 1951년에 헐리게 된다. 항복 전 독일의 마지막 저항선이었던 베를린의 많은 건물들이 소련의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독일 국회의사당 역시 크게 부서졌다.
전쟁 후의 냉전시대에 독일 국회의사당은 서독에 위치하였으나, 그 바로 옆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면서 냉전의 최전선으로의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분단 이후 서독은 임시수도 본에 의회건물을 지었고 동독은 구 프로이센 왕궁터에 새로 공화국 궁전을 건설(현재는 철거)해서 정부청사 겸 국회의사당으로 썼다.
서독에 있던 독일 국회의사당은 폐허에 가깝게 망가진 상태였다. 통일 이후 재건에 대한 논쟁 끝에, 파울 바움가르텐(Paul Baumgarten)에 의해 재건되었고, 의회 위원회의 회의 장소로 역할을 하였다. 이후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에 의해 독일 국회의사당의 재건축이 이루어지면서 1999년 4월에는 새롭게 단장한 건물에서 다시 의회가 개최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와 독일 두 국가 모두 전쟁으로 인해서 국회의사당이 파괴되고 다시 재건되는 과정을 거쳤다. 또다시 전쟁으로 인해서 국회의사당이 파괴되고 다른 건물이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이 있다. 현재 우리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오래오래 입법부로서 역할을 수행해 주었으면 좋겠다.
'Korean Politic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회의사당에는 포도주 72병이 묻혀있다! (0) | 2022.12.15 |
---|---|
MZ세대와 투표행태 (0) | 2022.09.20 |
유무선 전화 여론조사와 안심번호(가상번호)의 사용 (0) | 2022.08.08 |
국회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투표를 진행할까? (0) | 2022.07.31 |
대통령의 전직과 정치력 (0) | 2022.07.31 |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과 지방의회 권한 확대에 대하여 (0) | 2022.07.15 |
법치국가 vs 시행령국가 (0) | 2022.07.12 |
한국에서 지역정당은 가능할까? (0) | 2022.07.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