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어떤 이미지인가? 우리는 정치인을 떠올릴 때, 흔히 정장 복장에 국회의원 배지를 단 권위적인 이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에게는 청바지와 카디건을 입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한국 국회의원의 복장 논란들
우리나라의 몇몇 의원들은 이러한 정치권의 암묵적인 관행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복장으로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여성 의원이 바지정장을 입게 된 것은 불과 24년밖에 되지 않았다.
1993년 11월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서 황산성 환경처 장관이 바지정장 차림을 한 것이 당시에 큰 논란이 되었다. 이는 당시 국회에서는 여성 의원이 치마 정장을 입는 것이 암묵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년 뒤인 1996년 15대 국회에 입성한 이미경 통합민주당 의원이 처음으로 국회에 바지 정장을 입고 등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동료 여성 의원들과 '여성의원 바지 입기 운동'캠페인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여성의원들이 국회에서 바지정장을 착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과거 우리나라 정치인의 복장 논란은 이뿐만이 아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이른바 '빽바지 사건'의 주인공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2003년 4월 29일 유시민 국민개혁정당 의원은 회색 티셔츠와 흰색 면바지를 입고 국회에 등원하였고 의원선서를 위해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랐다.
유시민 의원의 복장을 본 동료의원들은 거세게 항의하였고 본회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그 영향으로 준비된 의원선서는 다음 날로 연기해야만 했다. 다음 날 정장 차림으로 등원해서야 의원선서를 진행할 수 있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존재한다.
그리고 2020년 8월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등원하여 큰 이슈가 되었다. 류호정 의원의 복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의원은 없었지만, 일부 SNS와 온라인커뮤니티에서는 비난성 글이 이어졌다.
이처럼 우리 국회에서 정치인들의 복장이 논란이 된 주된 이유는 오랫동안 구체화된 규정 없이 사무 정장 차림이 관행으로 굳혀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회법 제25조에 따르면 ‘의원은 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에서 품위의 유지라는 내용이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과거부터 '정장 착용'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외국의 사례
그렇다면 의원 복장에 대한 논란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걸까? 다른 국가에서도 의원복장에 대한 논란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국 하원은 '하원 행동 및 예절 규범'에서 '하원의 권위와 위상에 걸맞은 복장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동일한 규정 제31, 32조에서는 구체적으로 복장을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제33조에서는 하원의 권위에 부합되지 않는 복장을 한 의원에게는 발언권을 주지 않을 수 있으며, 심각한 경우 퇴장 명령까지도 가능하다.
2018년 프랑스에서는 급진좌파 정당 소속 프랑수아 뤼팽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 풋볼팀 운동복을 입고 본회의장에서 연설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는 전국 아마추어 구단을 돕는 무보수 봉사자들을 생각하려는 의도였지만, 당시 프랑스 의회는 국회의 관습을 어겼다는 이유로 벌금 1,300유로(한화 약 180만 원)를 청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하원 의회에서는 명문화된 복장규정이 도입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본회의장에서 의원의 복장은 중립적이고 외출복이어야 한다. 복장이 특정 견해를 표출하기 위해서 이용되어서는 안 되며 특히 종교적 상징성을 갖는 복장이나, 유니폼, 상업적 메시지나 정치적 성격의 슬로건을 포함하고 있는 복장은 금지하고 있다.
2019년 캐나다에서는 캐서린 도리온 퀘벡주 의원이 청바지와 후드티를 입고 의사당에 출근했다가 쫓겨나듯 퇴장한 사건이 있었다. 해당 의원은 당시 어두운 색의 청바지와 모자가 달린 주황색 상의를 입고 등장했다가 다른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의회는 국민의 것’이라며, "자신은 평범한 사람들을 대표하기 때문에 평범한 옷차림을 택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2021년 2월, 뉴질랜드에서 마오리당 공동 대표 라위리 와이티티 의원이 마오리족 전통문화 복장으로 출석하여 본회의장 밖으로 쫓겨났다. 국회의장은 그에게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발언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경고하였고, 그는 자신이 넥타이를 매지 않고 부족 전통 펜던트를 착용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퇴장조치되었다. 뉴질랜드 국회에서는 남자 의원은 반드시 넥타이를 착용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존의 규정이 강화되거나, 새롭게 만들어진 국가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복장에 대한 규정이 완화된 사례도 있다. 미국 의회 규정에는 "남성은 코트와 타이를, 여성은 적절한 의복을 착용해야 한다"는 조항이 존재한다. 이 조항 이외의 구체적인 규정은 없지만, 관행상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했다.
2017년 7월 한 여성 기자가 민소매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의장 로비 출입을 제지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공화당과 민주당 소속 여성의원 30여 명이 여성의원의 민소매 착용을 금지하는 관행을 비판하면서 '민소매 입는 금요일(Sleeveless Friday)'시위를 벌였다. 이후 하원의장은 복장 관행 현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여성의원의 민소매와 샌들의 착용을 허용하였다.
정치인에 대한 복장은 어느 국가에서든지 항상 뜨거운 감자다. 파격적인 복장의 의원을 두고 'TPO(시간, 장소, 상황)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복장이다', '국민들에 대한 예의가 없다'라는 지적과 '국회 관행을 깬 탈권위적인 복장이다', '복장과 일 처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는 매일 어떤 옷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까 등의 고민을 한다. 이런 사소한 의사결정은 에너지의 소모를 가져와 중요한 결정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하물며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정치인들이 복장을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집중한다면 국민들은 쓸데없이 기운만 빼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옷차림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의정활동을 하는 국회에서 눈에 띄는 복장으로 의정활동의 본질을 흐리고 불필요한 이슈를 일으킨다면, 분명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정치인은 정치로 말하고, 그 결과를 통해 평가받아야 한다. 따라서 현행 국회법에 명시된 '의원으로서의 품위'에 벗어나지 않는 복장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마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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