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릴 적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어떠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주제에 대하여 찬성 측과 반대 측이 나뉘어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는다. 수업 중에 실시한 토론의 경우 수업 시간이 종료되면 토론도 끝이 난다.
하지만 입법이 이뤄지는 국회에서는 어떨까? 국회가 열리면 필리버스터(Filibuster)라는 단어가 등장하곤 한다.
필리버스터(Filibuster)의 의미는 의회 안에서 다수파의 독주 등을 막기 위해, 합법적 수단으로 의사 진행을 지연시키는 무제한 토론을 의미한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라는 단어는 1851년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스페인어 필리부스테로(Filibustero)에서 나온 말로 해적 또는 도적, 해적선, 약탈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후 1854년 미국 상원에서 쿠바를 미국 영토로 병합하고자 하는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대파에 속한 의원들이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모습이 시초가 됐고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필리버스터(Filibuster)의 시작이다.
한국의 사례
우리나라에서 1948년 10월 2일 국회법 제정 당시 필리버스터가 도입된 이후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가장 처음 등장한 것은 1964년 당시 초선이었던 김대중 의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준연 의원의 구속 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회기 종료시간까지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을 해 결국 동의안을 무산시켰다.
김대중 의원의 발언은 단순히 시간을 끌기 위한 발언이 아니라 왜 체포 동의안을 처리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주장과 근거를 성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유신 체제를 선포하고 본격화한 1973년에 국회는 국회의 기본 원칙인 다수결의 원칙을 무시하고, 의사진행을 지연시켜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킨다는 이유로 무제한 토론의 발언 시간을 규정하는 국회법 조항을 신설했다. 사실상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금지시킨 것과 다름없었다.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사라지자 국회에는 연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동물국회로 변모한 후 몸싸움이 격화되면서 비판 여론이 커졌다. 그러다 2012년 4월 17일 국회 선진화법이 도입되면서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부활했다. 당시에는 몸싸움 방지법으로 불리기도 했다.
국회법에 따르면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하려는 경우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하면 의장은 해당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실시할 수 있다.
또한 해당 안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이 시작되면 의원 1인당 1회에 한 해 토론을 할 수 있고,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종료하려면 재적 5분의 3 이상의 찬성이 요구된다.
선진화 법 이후 2016년 2월 23일 테러 방지 법안의 통과를 막기 위해 첫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이뤄졌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2016년 2월 23일부터 3월 2일까지 192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더불어 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5시간 30여 분 토론을 진행했고, 이어 더불어 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2월 24일 10시간 18분에 걸쳐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을 진행했다.
이후 2월 27일에 같은 당 정청래 의원이 11시간 39분을 연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종걸 원내대표가 총 12시간 31분의 무제한 토론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기간의 토론에도 불구하고 결국 테러방지법은 통과됐다.
이후 2019년 12월 23일 3년 10개월 만에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신청됐다.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 수사처 설치에 대한 법률 입법안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정의당, 민주평화당 그리고 대안신당이 협의체를 구성하여 협의안 안건에 대해 본회의에 상정하자 이에 반대한 자유한국당이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신청했다. 이번 선거법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50시간이 지난 2019년 12월 26일 0시에 자동 종료됐다. 한국당의 거센 반박에도 불구하고 안건은 재적의원 167명 중 찬성 156명, 반대 10명, 기권 1명으로 가결됐다.
이후 2020년 12월 10일 국민의 힘이 국정원법 개정안의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강행했다. 국민의 힘 윤희숙 의원은 11일 오후 3시 24분에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시작해서 12일 오전 4시 12분에 종료되었다. 이로써 윤희숙 의원은 12시간 47분의 필리버스터(Filibuster)로 국내 최장 기록을 세웠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제와 관련 없는 발언이 금지되고 자리도 비울 수 없기 때문에 실로 놀라운 기록이다. 국회는 국정원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Filibuster) 종결 동의안에 대한 표결을 진행해 재적 의원 186명 가운데 찬성 180표로 가결했다. 더불어 민주당은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종료되자 곧바로 국정원법 개정안을 표결에 붙어 187명 찬성으로 가결했다.
외국의 사례
해외의 경우에는 어떠한 사례가 있을까? 대표적으로 미국과 캐나다의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은 1841년 미국 민주당 상원 의원들은 유럽 자본의 미국 시장 진출을 가능하게 하는 은행법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릴레이 연설을 펼쳤다. 이는 현대 정치 필리버스터(Filibuster)의 시초이다.
미국의 필리버스터(Filibuster) 최장 기록은 스트롬 서먼드(Strom Thurmond) 미국 상원 의원이 세웠다. 1957년 8월 28일 서먼드 의원은 인종차별 금지 법안을 저지하고자 반대 연설을 시작했다. 저녁 8시 54분에 시작된 연설은 다음날 저녁 21시 12분까지 이어지며 24시간 18분 동안 진행했다.
미국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의제와 관련 없는 내용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서먼드 의원은 독립선언서, 인권 법, 성경 책, 동화 등을 읽으며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상원은 그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민권법을 표결에 부쳐 가결했다.
캐나다의 경우 2011년 6월 우편노동자와 우정 공사 간 임금협상이 결렬되고 노조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순환 파업에 들어갔다. 공사 측이 이에 맞서 직장을 폐쇄하며 극한의 대립으로 치달았다. 결국 주요 도시의 우편 업무가 마비됐고, 보수당 정부는 강제 업무 재개를 위한 입법조치에 나섰다. 보수당의 입법을 막기 위해 신민주당은 58시간 동안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진행했다. 103명의 의원이 한 사람당 약 20분씩 발언을 했고, 10분씩 질의응답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에도 보수당은 끝내 법안을 통과시켰고, 2011년 7월 캐나다의 우편 업무는 강제 재개됐다.
이처럼 한국을 포함하여 미국과 캐나다 등 다양한 나라에서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진행한 사례를 알아보았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일종의 완충 장치로 볼 수 있다. 다수파와 소수파가 대립할 때 소수파가 다수파의 힘에 맞설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다. 즉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통해 국민들에게 야당의 목소리를 전함과 동시에 소수파는 명분을 얻고 다수파는 실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불필요한 의사진행을 계속해 필요한 논의를 방해하는 식으로 악용되거나, 표결을 고의적으로 방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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