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令夫人)이란 다른 사람, 특히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3인칭으로 높여 부르는 말이다. 사모님처럼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말이지만 잘 쓰이지 않는다. 대통령 부인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표준국어 대사전을 비롯해 어느 국어사전에도 그런 뜻은 없다. 대통령 부인을 지칭하는 법률적 용어는 대통령 배우자이며, 기혼 여성이 대통령이 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 당연하다.
‘영부인’이란 호칭이 대통령 부인만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기이다. ‘보통 사람의 시대’를 내세운 노태우 집권기엔 ‘영부인’이란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했고 이때부터 언론도 ‘대통령 부인’으로 호칭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영어로는 First Lady이다. 미국 연방법전(USC)은 대통령 부인을 ‘배우자’(spouse)로 표기한다. 일반적으로 쓰는 ‘퍼스트레이디’(first lady)는 1877년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 취임 때 한 기자가 그 부인을 ‘퍼스트레이디’라고 처음 부른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대통령의 배우자는 ‘민간인’이다. 대통령 부인은 법적으로 대통령의 가족일 뿐, 지위나 역할에 관한 뚜렷한 법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최고 선출 권력인 대통령과 함께 국내외 주요 행사에 참석하고, 때로는 대통령 대신 대외활동에 나서며 사실상 공직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배우자는 선거운동뿐만 아니라 대통령 임기 동안 매우 중요한 공적 역할을 수행한다. 미국의 경우,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배우자 엘리너 루스벨트는 퍼스트레이디 시절 빛나는 활동으로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퍼스트레이디’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배우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Rhee)는 대한민국 1대~3대 대통령 이승만의 아내이다. 프란체스카는 190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천주교 가문의 오스트리아 사업가 루돌프 도너 3명의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는 가업을 잇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에 그녀는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하였으나 3년 만에 이혼했다. 193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차 방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이승만을 처음 만났고, 모친의 반대에도 재혼을 강행하였다. 무려 25살 차였다.
이승만에게 프란체스카는 미모와 세련된 매너, 뛰어난 외국어 실력 등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녀는 1948년 UN 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승만을 따라 회의에 참관했다. 영부인 시절, 남편 이승만을 만나는 방문객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여 보좌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한편 남북 분단 상황에서 국제 통역 자격증과 능숙한 타자 실력으로 한국의 부족한 외교관을 대신에 민간외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이승만의 비서 역할과 전쟁 상황에서 구조물 요청도 도와주었다.
공덕귀는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아내이다. 공덕귀는 일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이때 한 선교대회에 나가 이광수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를 불렀다가 바로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1940년 일본 요코하마 공립 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바로 송창근이 담임목사로 있던 김천 황금동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 시절에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해 수차례 고문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었으나 그녀는 일체의 정치 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목회와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주변 여러 목사들의 권유로 1949년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윤보선과 결혼했다. 윤보선 시장은 52살, 공덕귀 여사는 38살이었다.
그녀는 남편 윤보선의 공직 생활에 관련된 것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영어와 일본어, 프랑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에 의전상의 대통령 배우자 접대 외에 남편을 대신해서 외국인 내빈과 저명인사들을 면담하기도 했다.
육영수는 대한민국 제5대~9대 대통령 박정희의 아내이다. 1938년 옥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배화 고등여학교에 입학 후 졸업했다. 1945년 21세 때 옥천 공립 여자 전수학교에 부임, 가사 과목 교사로 1년 3개월간 재직했다. 1950년 이종 육촌 오빠의 중매로 당시 육군 소령이던 박정희를 만났으며 6·25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박정희와 결혼했다. 당시 박정희는 첫 부인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재혼하였다. 박정희는 34살, 육영수는 26살이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공관에 있을 시절 육영수의 주된 관심은 민원 처리였다. 이는 육영수가 청와대 안의 제1야당이라고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육영수는 여성회관 설립, 적십자 활동, 양로, 구호 사업 등 많은 봉사활동과 경제 재건 사업을 실시했다. 대표적으로 문둥병 환자들을 위해 청와대로 불러 다과회를 열고 구호물자를 보내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소록도는 문둥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격리되던 곳인데 이러한 육영수의 행보는 지금도 소록도에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소록도는 전라도에서 유일하게 2018년 대선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높았던 곳이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는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으로 인해 문세광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박정희가 1979년 10.26 사건으로 암살당하기 전까지 5년간 장녀 박근혜가 외국 정상 접견 등 통상 영부인이 담당하는 역할을 대행했다.
홍기는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최규하의 아내이다. 할아버지가 한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웃어른으로부터 한문을 배우며 교양을 쌓았으나 정규 교육기관에는 다니지 않았다. 19살이던 1935년 할아버지의 중매로 경성제일고보 학생이었던 최규하와 결혼했다. 당시 신랑은 16살이었다.
다만 남편인 최규하 전 대통령이 주일대표부에 근무하던 8년간 일본어를 공부해 능숙하게 구사하였다고 하며, 또한 주 말레이시아 한국 대사관에서 영어를 익혔다고 한다. 만 8개월 10일간 재임하여 역대 영부인들 중 재임 기간이 가장 짧았다. 대외활동에서 가장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영부인으로,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 부덕을 지녔다는 평을 들었다. 실제 홍기는 청와대 시절 양로원과 보육원 지원에만 앞장섰을 뿐 대외활동을 삼갔다.

이순자는 대한민국 제11대 12대 대통령 전두환의 아내이다. 1957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1958년 이규동 씨가 육군사관학교 참모장이었던 당시 아버지의 관사에 드나들던 육군 위관 장교 전두환과 결혼하였다. 1980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후 40대 초반의 젊은 대통령 배우자의 화려한 의상은 국민들에게 거만하고 사치스럽게 보였다.
조기 결혼으로 ‘의사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순자는 1984년 새세대 심장재단을 발족해 심장병이 있는 어린이들의 치료를 도왔다. 이순자는 친인척 비리, 심장재단 비리, 거만하고 사치스러운 생활 등으로 영부인 재임 시절에 많은 구설수에 올랐다.
김옥숙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의 아내이다. 경북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가정교육과에 진학하였다가 오빠(김복동)의 육사 동기인 노태우와 결혼해 대학을 중퇴하였다. 취임 초기부터 ‘그림자 내조’를 내세우며 잠행 스타일을 고수했다. 한 일은 많지만, 존재감이 옅은 남편 노태우를 닮았다. 원래는 무척 적극적인 성격이지만, 바로 전 영부인이었던 이순자가 워낙 나대고 다니면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만큼 이를 교훈 삼아 일부러 조용히 지냈다는 주장도 있다.
공개석상에서 무조건 90도로 인사하고, 노태우 옆에서 미소를 띤 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인터뷰도 거의 한 적이 없으며, 복지 기관 방문 등의 단독 일정도 무조건 비공개였다.
손명순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의 아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노무현의 아내인 권양숙과 같은 대창 초등학교를 나왔다. 마산여자중학교와 마산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고, 1951년 김영삼과 결혼하였다. 당시 이화여대 3학년에 재학 중으로, 이화여대는 재학생의 결혼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도움으로 첫아이를 낳고도 졸업 때까지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1983년 5월 18일 김영삼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 기념일에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항의로 23일간의 단식투쟁을 했을 때 직접 간호하였다. 대통령 배우자 시절에는 청와대 수행원들 및 운전기사, 여성 직원들을 위한 식당이나 휴게실을 만들었다.
이희호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아내이다. 이화 고등여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전과하여 수학한 후 1950년 교육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해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피난살이의 와중에도 이태영,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대한 여자 청년단(1950년), 여성문제 연구원(1952년) 등을 잇따라 창설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54년에 미국 유학을 갔고 미국 램버스 대학교에서 사회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스칼릿 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8년 미국에서 귀국한 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강사가 되었고 여성문제 연구원 간사, 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직 등을 역임하였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 YWCA 총무로 일하며 여성계 지도자로 자리 잡아가고 있던 시점인 1962년 5월 41세의 나이로 예전의 서울의 대학생 모임에서 알던 39세의 김대중과 결혼하였다.
이희호는 행정부에 여성부가 설치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독자적인 해외 순방을 5번이나 갔다. 2002년 유엔 의장국 대한민국의 대표로서 유엔 총회에 참석하였는데, 김대중을 대신해 참석한 이 총회에서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권양숙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아내이다. 노무현과 같은 국민학교(현재의 진영 대창 초등학교)를 나와 부산 혜화여자중학교를 졸업, 혼성 여자상업고등학교(현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노무현과는 1973년 결혼했으며, 노무현의 사법시험 준비를 뒷바라지했다. 권양숙은 장애인 단체 관계자 210여 명을 청와대 영빈관으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하며 격려했다. 또 권양숙은 입양가족 200여 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 하며 건의사항을 듣고 환담했다.
2003년 04월 18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제23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 참석, "진정한 장애는 신체적 장애가 아니라 마음의 장애"라는 말을 남겼다. 그 외 2003년 전국 자원봉사자 시상식에 참여하는 등 주로 사회의 약자와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 장애인들에게 많은 관심과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재단법인 아름다운 봉하 이사장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배우자가 없다. 197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 곁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경험이 있었다.
김윤옥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의 아내이다. 대구 수창 초등학교와 대구여자중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를 졸업, 1970년에 이화여자대학교 보건교육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9일 오빠의 소개로 만난 이명박과 만 23세에 결혼했다.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 및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내조를 했고, 이명박의 정계 입문 이후에는 서울시장 부인, 그리고 2008년 2월부터는 청와대에서 대한민국 영부인으로 지냈다.
김윤옥은 영부인으로 재임 중 한식 세계화 정책을 본격 추진하기 위해 2009년 5월 4일 한식 세계화 추진단의 명예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6월 10일 자 홍콩 일간지 사우스차이나 모닝 포스트에 “아시아 여성이 녹색성장에 앞장 서자"라는 주제의 기고를 통해 한국 녹색성장 정책을 홍보하기도 하였다. 김윤옥은 오랜 기간 자원봉사 활동에 꾸준히 참여해 왔다.. 청량리 다일공동체에서 20년째 '밥퍼'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신촌 세브란스병원 소아병동도 매달 꾸준히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월급통장을 관리하면서 계좌이체를 통해 불우이웃에게 매달 생활비를 전달했다.
김윤옥의 조용한 지원은 정부 정책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계 부처의 관심을 유도하고 신속한 결정과 추진에는 확실한 도움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김윤옥은 2007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이 후보의 작은 눈이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는 눈”이라고 남편의 ‘약점’을 유머로 넘기는 등 재치로 유권자의 호감을 샀다.
김정숙은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문재인의 아내이다. 숙명여자중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서울 시립합창단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문재인과는 캠퍼스 커플로 대학 시절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만난 것이 첫 만남이라고 한다. 이때만 해도 오다가다 인사하는 정도의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위하던 문재인이 선두에서 확산되기 전의 응축된 최루가스를 직격으로 맞아 쓰러졌는데, 때 김정숙이 쓰러진 문재인을 직접 간호해 주면서 서로 눈이 맞아 이후 사이가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 김정숙은 많은 존재감을 보였다. 우선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김정숙 여사 소식’이라는 카테고리가 따로 있다. 청와대 공식 인스타그램에도 김정숙의 소식은 꾸준히 올라온다. 폭우 피해를 입은 청주의 한마을을 찾아 그는 고무장갑을 끼고 쪼그려 앉아 가재도구 씻기 등 복구 작업을 함께했다. 위로와 공감의 아이콘이라며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외교적으로 보면 문 대통령은 취임 후 26개월간 21회 출국했다. 김정숙은 여기서 2018년 5월 일본 당일 출장을 빼고 20회의 해외 순방에 모두 동행했다. 동행률 95.2%인 셈이다. 일각에서 대통령 해외 순방을 두고 ‘부부동반 세계 일주’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내성적인 성격은 해외 순방 시 사교성 부족으로 비칠 수 있는데, 이를 활달한 김정숙이 적절히 보완해 주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영부인이라는 명칭은 공식 직함이 아니다. 헌법에도 영부인의 의무나 책임, 보수의 규정은 없다. 요컨대 정해진 ‘영부인의 역할’은 없다는 말이다. 그저 대통령이 수행하는 공적 기능을 어느 정도 함께하길 기대하는 대상이다. 문제는, 그 ‘어느 정도’를 둘러싸고 이견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만일 그것이 ‘정치적’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영부인에게는 재임 동안 정해진 의무나 책임이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영부인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 역할을 해석해 왔다..
영부인은 여러모로 어려운 자리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남편의 행정 업무에 관여하게 되면, 책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쉽게 말해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 자리’인데 여기서 균형을 어떻게 잘 잡느냐가 관건” 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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