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모르는 사람과 만나면 먼저 하는 일이 있다. 호구조사다. 상대편의 나이를 알아서 나의 위치를 정하기 위해서다. 상대편보다 나이가 많으면 내가 형님이다. 같이 밥이라도 먹을라치면 밥값은 으레 형님이 내야한다. 아랫사람은 당연하게 얻어먹고, 이후 ‘형님’이라는 호칭을 꼭 붙이고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
한국에서 남성은 대부분 군대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가 남성 집단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착오다. 자세히 보면 여성들도 만나면 남성과 똑 같은 순서를 밟고 ‘언니’와 ‘동생’으로 위계질서가 형성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유치원급의 연령대를 잘 보라. 이들도 만나면 나이부터 따진다. 같은 나이면 누가 일찍 태어났는가를 보고 위와 아래를 결정한다.
운전하다 접촉하고가 났을 때도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당신 몇 살이야?”가 먼저 나온다. 한국사회에서 나이를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에 위반된 행위를 하면 그 집단에 속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한국 선거의 예
이러한 나이를 중심으로 한 위계구조는 한국정치에도 반영되어 구조화되어 있다. 우리나라 공직선거법에서는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일 경우에는 연장자 순으로 당선인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만약 두 후보가 동갑이면 생일이 하루라도 빠른 후보가 당선된다(공직선거법 188조, 190조, 191조).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동표가 나왔을 대 당선의 기준을 연장자로 정하는 것에 대한 법적 근거는 명확치 않다. 다만 과거의 유교적 사상 때문에 선거에서도 연장자를 우대하는 조항이 남아있지 않나 추측해 본다.
공직선거법 제188조①: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있어서는 선거구선거관리위원회가 당해 국회의원지역구에서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 다만,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인 때에는 연장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
공직선거법 제190조①: 지역구 시·도의원 및 지역구자치구·시·군의원의 선거에 있어서는 선거구선거관리위원회가 당해 선거구에서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 다만,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인 때에는 연장자순에 의하여 당선인을 결정한다.
공직선거법 제191조①: 지방자치단체의 장 선거에 있어서는 선거구선거관리위원회가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하고, 이를 당해 지방의회의 장에게 통지하여야 한다. 다만,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인 때에는 연장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
기초의원 선거는 전체 선거구 유권자 수가 적어 극히 미미한 차이로 승패가 갈린 적이 종종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총 7번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동일 득표로 연장자가 당선된 경우는 총 7번이다.
연장자가 당선된 사례 가운데 가장 적은 나이차는 1세였다. 제1회 지방선거 구·시·군의회에서 전남 신안군에 출마한 고서임, 윤상옥 후보는 모두 379표를 얻어 동일한 득표수를 기록했으나 윤 후보가 고 후보보다 1세가 더 많아 당선됐다.
외국 선거의 예
다른 나라는 어떨까. 선거의 동점자 문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선거가 있는 나라에서는 어디든지 발생할 수 있다. 동점자 처리에서는 나라마다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 추첨을 한다.
필리핀은 ‘동전 던지기’ 그리고 홍콩은 ‘탁구공 뽑기’ 등을 한다. 미국은 35개주가 선거에서 동점자가 나왔을 때 동전 던지기, 제비뽑기, 보자기 속에 이름을 적어 놓고 뽑기 등 추첨으로 당선자를 가린다.
연장자 우선 원칙의 다양한 예들
공직선거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연령적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의 장유유서(長幼有序) 전통이 뿌리 깊다. ‘연장자 우선’ 원칙은 국회에서도 적용된다(국회법 18조, 47조, 112조).
국회의장단이나 상임위원장은 다선, 중진만이 나설 수 있다는 암묵적인 관행이 있다. 국회의장에 나서려면 최소한 4선 이상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표결에 여러 사람이 나서 만약 같은 표를 얻은 후보 2명이 있다면 연장자가 당선된다. 상임위원장도 3선 이상 의원 정도는 되어야 지원이 가능하다. 이러니 40대 상임위원장, 50대 국회의장은 보기 힘들다.
국회법 제18조: 의장 등의 선거에서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할 때에는 출석의원 중 최다선(最多選) 의원이, 최다선 의원이 2명 이상인 경우에는 그 중 연장자가 의장의 직무를 대행한다.
국회법 제47조②: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선임될 때까지는 위원 중 연장자가 위원장의 직무를 대행한다.
국회법 제112조⑥: 국회에서 실시하는 각종 선거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무기명투표로 한다. 투표의 결과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최고득표자와 차점자에 대하여 결선투표를 함으로써 다수득표자를 당선자로 한다. 다만, 득표수가 같을 때에는 연장자를 당선자로 한다.
‘연령’을 기준으로 하여 2인 이상의 최고득표자들 중 1인의 당선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선거과정이나 득표결과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요소를 기준으로 하여 합리적 차별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연령에 의한 당선인 결정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기준에 의한 차별 취급이다.
이런 ‘연장자 우대 원칙’은 정치 혹은 정치인의 노령화를 낳는다. 국회의원의 평균 나이가 50대 중후반을 넘고 있다. 사회에서 은퇴할 나이의 사람들이 국회에서는 신인 취급을 받고 있다.
따라서 득표수가 같을 경우 재투표를 실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그렇지 않으면 선거과정에서 선거 규정을 적게 위반한 자, 먼저 입후보등록을 한 자, 또는 추첨 등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다음은 2003년도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상황실태조사 보고서에 실린 권고사항이다.
대법원장·대법관의 선거, 국회 내의 각종 선거, 교육위원회 의장·부의장의 선출, 노동위원회 공익위원의 위촉 등에서 득표자가 동수인 경우 연장자를 선출·위촉하도록 규정하거나, 국회 내지 정부 산하 각종 공공위원회에서 의장·부의장·위원장을 대신하는 직무대행자를 연장자로 규정하고 있는 법령은 그 합리성이 의문시 된다... 합리적 이유 없는 연장자우대는 연하자의 배제에 따른 차별을 발생시키므로 보다 합리적인 다른 기준(예컨대, 호선)이 있다면 그에 의존하는 것이 연령차별금지의 관점에 부합한다.
이철승 교수는 <불평등의 세대>에서 ‘벼농사 체제’가 가져온 위계 구조가 우리 사회의 근간이라고 했다. 나이가 많은 집단이 어린 집단을 지배함으로서, 연장자 집단 중 엘리트가 전체를 지배하도록 짜인 연고서열형 협업 체제가 우리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벼농사를 할 때는 연장자의 지식과 기술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진입했다. 기술 환경과 국제질서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가 더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연령과 위계보다는 능력에 따라 지도자가 정해지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닐까.
일반사회 조직에서의 선출 규정
초등학교 회장을 선출할 때도 ‘연장자 우대 철칙’은 지켜지고 있다. 또, 2015년부터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조합장 선거에서도 ‘투표결과 득표수가 같을 때에는 연장자를 당선자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농협 정관 제86조 제1항). 그 결과 전국적으로 경기도 연천농협과 임진농협 그리고 제주도 고산농협 등 동점을 기록한 곳이 세 곳이나 되었다.
신협중앙회,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장 선거, 대한기계학회, 산림조합 등 우리사회 대부분의 기관과 조직도 동일한 규칙이 적용된다. 놀라운 것은 조계종도 연장자 우선 원칙(법랍(法臘) 순, 스님이 된 뒤로부터 헤아리는 나이)을 가지고 있다. 지독한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을 보여주는 예이다.
선거에서의 동점과 결투
미국에서는 대통령선거의 동점 상황이 결국 현직 부통령과 전직 재무장관의 역사상 초유의 결투로 진행된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헌법이 개정되기 전인 220여 년 전에 대통령 선거에서 동점자가 나온 적이 있다. 제3대 대통령선거였던 1800년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에런 버(Aaron Burr) 두 후보자가 선거인단 선거에서 동점이 됐다. 대통령선거에서 동점자가 나오면 하원에서 선거를 다시하게 된다.
그러나 좀 다른 점은 두 후보 중 승자가 대통령이 되고 패자는 부통령이 된다는 점이다. 결국 제퍼슨은 36회 투표 끝에 대통령이 됐고, 에런 버는 부통령이 됐다. 이 선거에 전 재무장관이었던 유명한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제퍼슨을 적극 지지한데 원한과 증오를 갖고 있던 에런 버가 결투를 신청한다.
1804년 7월 11일 결투 결과 해밀턴은 사망하고, 에런 버도 ‘정치적’으로 사망한다. 이후 미국 대통령선거의 경우, 후보자들이 모두 과반이 안 되거나 동점이 되면 12차 헌법 개정에 따라 대통령은 하원에서, 부통령은 상원에서 투표로 선출한다.
참고자료
김덕현, “공직선거법상 연령에 의한 공무담임권 제한의 위헌성 검토: ‘대통령·국회의원 피선거권 연령 제한’, ‘2인 이상 최고득표 시 연장자 당선’ 규정을 중심으로”, 『공익과 인권』, 제15호(2015).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누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었는가』, 문학과지성사(2019).
임재주·서덕교·박철·장은덕, 『국회의 이해』, 한울(2019), 56쪽.
조용만, 『연령·학벌·학력 차별시정 국가정책계획수립을 위한 기초현황조사』, 국제노동법연구원(2004), 9~10쪽.
중앙일보, “재검표해보니 투표 결과 ‘동수’...미국선 ‘동전 던지기’로 당선자 가려”, (201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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