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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Politics

예루살렘과 ‘두 개의 국가 해법’ 그리고 팔레스타인

by 누름돌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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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만든 것은 영국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영국은 오스만제국을 해체해 중동의 땅과 자원을 차지하려했다. 1차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땅을 장악한 영국은 이집트 수에즈 운하 이권을 보호하고, 송유관을 건설하기 위해 친영국 유대국가 건설을 지원했다.

 

영국 정부와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존하며 살아온 팔레스타인을 “민족없는 땅”으로 선전하면서 이곳에 유럽 유대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19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 당시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마을 500곳을 파괴하고, 수천명을 살해하고 75만명을 내쫓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나크바’(대재앙)라고 부르는 이날 ‘피난민’이 된 이들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예루살렘의 역사

 

 

코르푸스 세파라툼. ‘분리된 몸체’를 뜻하는 라틴어다. 1947년 예루살렘의 지위를 ‘코르푸스 세파라툼’(Corpus Separatum)으로 규정했던 유엔결의안 181호에서 가져온 것이다.

 

영국이 철수하기 전, 1947년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되, 세 종교 모두가 양보할 수 없는 성지로 여기는 예루살렘은 유엔을 대신해 신탁통치위원회가 통치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3개 종교가 예루살렘을 모두 신성시한다. 

 

예루살렘을 국제법상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특별한 국제체제로 분리해낸다는 이 구상엔 사실 성지 통치권을 무슬림에게 주지 않겠다는 서구 열강의 의도가 짙었다. 영토 분할 비율도 팔레스타인 쪽에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나마도 실행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그 이듬해 건국을 선포하고 1차 중동전쟁을 통해 팔레스타인 영토 78%와 서예루살렘을 차지했다. 1967년 6일전쟁 이후엔 가자와 서안지구, 동예루살렘까지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유엔은 그해 결의안 242호를 통과시켜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점령이 불법임을 분명히 했다.

 

 

‘두 개의 국가 해법’이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전 영역을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의 국가로 성립돼 평화적으로 공존하자는 개념이다. 유엔 등 국제사회는 당시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안지구를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지 않는다.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 역시 예루살렘에서 양쪽이 공존하는 ‘2국가 해법’을 전제로 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모든 국제사회 결의를 부정하고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연합뉴스)

 

 

 예루살렘과 성전산의 역사

 

 예루살렘은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등 뿌리가 같은 3대 계시종교 공동의 성지이다. 이스라엘과 아랍·이슬람권 양쪽은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근거로 서로 자신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그중에도 유서 깊은 옛 시가지인 동예루살렘이 핵심 지역이다.

 

1947년 유엔 결의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 일부를 분할받고 이듬해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을 건국할 당시,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지역으로 설정됐다. 그러나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예루살렘과 요르단이 점령한 동예루살렘으로 나뉘었다. 이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지금까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 

 

출처: 한겨레

 

 

고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동예루살렘에는 이슬람교의 알아크사 사원과 바위돔(황금돔) 사원, 유대인 수난사의 상징적 장소인 ‘통곡의 벽’이 모여 있는 언덕이 있다. 이스라엘이 ‘성전산’(Temple Mount), 이슬람이 ‘하람 알샤리프’(거룩한 장소)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2천년 전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뒤 주검이 묻혔다는 자리에 세워진 기독교 성묘교회도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유대인의 유일신 야훼(하느님)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 천사의 목소리가 말렸다고 전해진다. 이런 전승은 이슬람 경전 코란에도 나온다. 다만, 제물로 바치려던 아들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진 않는다. 이슬람 학자들은 아브라함이 장남이자 이삭의 이복형 이스마일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해석한다. 또 이슬람교를 창시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스마일의 후손이라고 본다.

 

통곡의 벽

 

 

성경에 기록된 모리야의 산이 바로 ‘성전산’이다. 이스라엘이 이 언덕을 성전산으로 지칭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곳은 이스라엘 왕국 시절이던 기원전 10세기 솔로몬왕이 지었으나 바빌로니아 제국에 정복당하면서 파괴됐다는 첫번째 성전이 있던 자리다. 기원전 5세기에 유대민족 지도자 스룹바벨이 바빌론에 끌려갔던 포로민들과 함께 풀려나 귀환한 뒤 재건(제2성전)했다. 이어 기원전 2세기에 헤롯왕이 보수·증축했으나 서기 70년 로마 제국이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뒤 파괴했다는 유적지다. 민족 정체성의 구심 같은 곳이다.

 

반면 이슬람은 이 언덕을 ‘하람 알샤리프’, 즉 거룩한 성지로 여긴다. 7세기 이슬람교를 창시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바로 이곳 바위에서 승천했다는 믿음에서다. 8세기에는 그곳에 바위돔 사원과 알아크사 사원을 잇달아 세웠다. 바위돔 사원은 둥근 돔의 겉면을 5천개(약 80㎏)의 금박 조각으로 장식해 황금돔 사원으로도 불린다.

 

통곡의 벽은 성전산 성곽의 서쪽 옹벽을 가리킨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 약 300년 동안, 유대인은 성전 몰락에 대한 애도일을 빼고는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됐다. 유대인들이 애도일에 옹벽 앞에 모여 기도하며 울던 관습에서 ‘통곡의 벽’이란 명칭이 생겨났다. 이스라엘 유대인은 19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야 성전산을 드나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휴전 합의에 따라, 무슬림은 성전산 경내에서 기도와 예배를 할 수 있지만 유대교도는 통곡의 벽 밖에서만 허용됐다.

 

예수가 처형 뒤 사흘 만에 부활하기 전까지 주검이 묻혔다는 곳에 세워진 ‘성묘(거룩한 무덤)교회’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뒤 창건됐다. 지금은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콥트교 등 기독교 주요 종파들이 구역을 나눠 관리한다. 오늘날 세계 기독교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순례지 ‘비아 돌로로사’(십자가 고난의 길)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

 

 

현재 전 세계 팔레스타인인 1210만명 가운데 65%인 790만명이 난민이다. 난민들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영토인 서안(약 300만)과 가자지구(약 230만) 그리고,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등 주변 아랍국가들의 난민촌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거의 절반은 국적이 없다. 사방이 높이 6m 분리장벽으로 둘러싸인 ‘세계 최대의 난민촌이자 감옥’인 가자지구 주민 230만명 중 70%는 이스라엘에 땅과 집을 빼앗기고 쫓겨난 난민들이다. 가자지구 안 8개 난민캠프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인데, 가자시티의 비치캠프에는 0.52㎢의 땅에 8만4077명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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