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선거철이 돌아올 때마다 길거리에는 각 후보자의 다양한 선거 유세 방송이 들려온다. 마찬가지로 거리의 벽과 게시판에도 여러 후보자들의 사진과 후보자의 정치적 방향성을 특징짓는 표어들이 담겨 있는 선거 벽보들이 매년 붙여져 오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정치적 상황들을 겪으면서 후보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와 이념을 선거 벽보에서 어떠한 표정과 키워드로 표현했을까?
한국의 선거벽보 변천사
선거 벽보는 인쇄매체를 이용한 정치 광고로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부착한다. 선거 벽보는 유권자들의 투표 행위를 통해 당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끔 제작하여야 하며, 현대사회에서 포스터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역할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포스터를 보는 대중들에게 그 내용이 인상 깊게 다가와야 한다. 그러므로 논리적 설명보단 시각적인 전달 방식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대통령 후보 선거 벽보 역시 선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홍보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대통령 후보 선거 벽보는 새로운 대통령 후보의 이미지를 짧은 시간 안에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선거 홍보 방식이다. 대통령 후보 선거 벽보는 이전에는 "선전벽보"로 지칭되었으나, 2010년 1월 공직선거법 개정 이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선거벽보"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각 나라마다 시행하고 있는 정부형태들이 다르고, 마찬가지로 정부 형태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 방식 또한 다양하다. 한국에서도 국회에 의한 간접선거와 국민 직접선거, 통일주체 국민 회의에 의한 간접선거 등 투표 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어왔다. 이러한 투표 방식의 변화들에 따라 대통령 선거에서의 선거 벽보의 형태도 달라져왔다. 한국의 선거 벽보 후보자 표현방식은 87년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선거는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직접선거가 아닌 국회에 의한 간접선거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했기 때문에 별도의 후보자 등록 절차가 없었고, 공식 선거 벽보 자료도 남아있지 않다.
제2대 대통령선거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국민 직접선거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 선거이다. 당시의 이승만 전 대통령 선거벽보에서 “박사”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한국의 대중들이 "이승만" 하면 "미국 박사"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지적인 정치인"으로 재단함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올렸고 손쉽게 재선에 성공했다.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당시 민주당의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구호에 맞서 “갈아봤자 더 못 산다!”라는 구호를 만들어, 민주당의 구호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또한 근엄한 표정의 초상사진과 더불어 봉황과 무궁화를 벽보에 넣음으로써 본인의 권위적인 이미지를 더욱 강조했다. 이전의 선전 벽보에 정당과 후보자의 이름, 초상사진 정도만 포함시켰던 것과 달리 이때 벽보에 최초로 사언 절구형 선거 구호를 삽입하였다.
제4대 대통령선거는 3.15부정 선거로 인한 4.19혁명이 발생함에 따라 직접선거에서 간접선거로 투표 방식이 바뀌었고, 국회에서 민의원과 참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윤보선 후보가 당선되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별도의 선거 벽보가 제작되지 않았다.
5.16 군사정변으로 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로 제5~9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박정희는 선거벽보에서 “새 일꾼에 한 표 주어 황소같이 부려 보자!”, “보다 밝고 안정된 내일을 약속합니다”라는 구호를 사용하여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강조했으며 소속 정당의 이미지를 황소로 채택하여 이를 선거 벽보나 홍보물에 이용함으로써 “일하는 정당, 일하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또한 무표정한 이미지의 초상사진을 사용하여 본인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부각시켰다.
박정희에 맞서 제5~6대 대선에 출마했던 신민당 윤보선 후보와 제7대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는 각각 “빈익빈(貧益貧)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뿌리 뽑자”,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참겠다 갈아 치자!”라는 구호와 "박정해서 못 살겠다, 윤택하게 살아보자",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사용하여 박정희 정권이 추진 중이었던 경제발전 정책의 비판과 더불어 당시 장기집권 중이었던 박정희 자체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후 1972년 10월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함에 따라 유신헌법에 의해 치러진 네 번(제8대(박정희), 제9대(박정희), 제10대(최규하), 제11대(전두환)의 대통령선거는 모두 후보자가 한 사람이었고, 1981년 2월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 투표 방식으로 시행했으며, 전두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앞서 시행된 4번의 선거에서 공식적인 대통령 선거 벽보는 제작되지 않았으며, 12대 대선 또한 사실상 이전의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에 불과해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선거라고 할 수 없었다. 선거벽보의 역할 또한 유권자에게 후보자를 알리는 본래의 제 기능을 상실하고 그저 본인의 소속을 나열하고 본인들의 정치적 의견만 내보이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에 그쳤다.
87년 민주화 이후 16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함에 따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소속 노태우 후보는 “이제는 안정입니다”라는 구호와 더불어 선거 벽보 사상 처음으로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을 포스터에 사용함으로써 민주화 이전의 선거벽보 모습들과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친근한 이미지를 연출하고자 하였다.
이후 제14대 김영삼, 15대 김대중, 16대 노무현, 17대 이명박, 18대 박근혜, 현재의 19대 대통령인 문재인 또한 노태우와 마찬가지로 선거벽보에서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거나 미소를 짓는 사진을 사용하여 따뜻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강조하였으며, 사진의 구도도 측면 사진 대신 주로 정면 사진을 사용하여 유권자와 눈 맞춤을 시도,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정치를 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컬러 또한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에 맞게끔 옷차림과 상징색으로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가령 김대중은 당시 사용했던 “든든해요, 경제를 살립시다!”라는 선거 구호에 맞게끔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이미지 형성을 위해 깔끔한 블랙 정장을 입은 사진을 선거 벽보에 사용하였고, 노무현은 노란색 컬러를 자신의 정치적 상징색으로 사용하여 젊은 유권자들을 공략하였다. 박근혜 또한 소속 정당의 상징색인 레드 컬러의 의상을 착용함으로써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차분하면서도 부드럽고 강렬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또한 대체적으로 짧고 간결한 표어를 내세움으로써 민주화 이전의 사언 절구형 구호를 벗어난 모습을 보였으며, 각 후보의 정치적 개성이 드러나는 표어를 채택했다. 이명박은 이전의 경영인으로서의 이력과 서울시장 출신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경제 대통령"을 본인의 주요 키워드로 내세워 경제와 민생 분야 공약을 중심으로 선거 벽보를 구성하였으며, 박근혜 또한 당시 선거에서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표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당선될 경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처럼 민주화 이전의 선거 벽보와 민주화 이후 제13대 대선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선거 벽보의 표현방식은 큰 차이점이 있다. 민주화 이전의 대통령 후보들은 사진에서 주로 무표정하고 경직된 자세를 취하고, 사진의 구도 측면에서도 정면을 바라보기보단 주로 측면 사진을 사용하여 본인의 권위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강조하였다면, 민주화 이후 제13대 대선에서부터 제일 최근의 19대 대선에서의 대통령 후보들은 사진에서 활짝 미소 짓는 표정과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다양한 컬러를 사용함으로써 권위적 이미지보다는 보다 더 친근하면서도 후보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다양한 모습을 강조하고자 했다.
또한 선거벽보 구호에서도 민주화 이전에는 각 후보 간의 명확한 정치적 대립구도를 표출, 단순히 상대 후보를 비판하려는 목적의 메시지가 주를 이뤘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상대 후보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보단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본인만의 정치적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짧은 구호를 주로 선정하였다.
미국의 선거벽보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인 미국과 비교해 보면, 2000년대 이전 미국 대통령 선거벽보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후보자 본인을 이미지화하여 선거 벽보를 구성한 방식을 볼 수 있다.
이승만은 봉황과 무궁화를, 박정희는 황소를 본인에 빗대어 표현했던 것처럼,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예수(Jesus Christ)와 본인의 이니셜이 J.C.로 같다는 점을 활용하여 지미 카터 본인을 예수에 빗대어 "지미 카터가 미국을 구할 수 있다(J.C. CAN SAVE AMERICA!)"라는 구호를 포스터에 포함시켰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 또한 경제 불황을 겪고 있던 미국의 상황을 고려하여 당시의 미국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허름한 통나무집과 사과술을 포스터에 담아 유권자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또한 경제의 안정과 해결을 강조한 메시지를 사용하여 선거에서 승리한 사례도 있다. 1984년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재선에 도전하며 “미국을 돌려드립니다!(Bringing America Back!)”라는 구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유권자들에게 미국 경제의 안정이라는 낙관적 미래를 제시하여 유권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마찬가지로 1992년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경우에도 당시 미국의 경제 문제를 언급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를 사용하여 유권자들로부터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후보자의 사생활 관련 악재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최근 한국의 선거 벽보 표현방식과 미국의 선거 벽보 표현방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은 후보자 중심, 미국은 철저히 유권자 중심이라는 것이다. 한국처럼 후보자가 유권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선거 벽보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가 정치인으로부터 듣고 싶은 메시지를 담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화 전후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의 선거 벽보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왔고, 유권자들의 한 표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의 선거벽보 모습에서 벗어나 만화 형식으로 선거 벽보를 구성하는 등, 개성 있는 형태들의 선거 벽보들도 종종 보이고 있다. 앞으로는 또 어떤 형태의 선거벽보들이 나타나 유권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지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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