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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Politics

정치인과 단식

by 누름돌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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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과 정치인이 단식 투쟁을 하는 뉴스를 종종 볼 수 있다. 단식투쟁은 정치적 시위 또는 특정 사안의 관철 등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의로 단식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비폭력 저항 방식이다. 단식은 하루에 200kcal 미만으로 탄수화물을 비롯한 열량을 낼 수 있는 음식 섭취를 제한하고 몸의 유지에 필수적인 물과 소금은 섭취하는 방법이다.

 

의사들은 특별한 건강 문제가 없었던 사람이라면 체력에 따라 최대 90일 정도까지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과거 영국에 저항한 북아일랜드 공화국군 죄수들이 단식투쟁을 하다가 사망한 시기는 단식 후 45일에서 73일이라고 전해진다.

 

 

 


한국에서 단식투쟁을 오랫동안 한 사람은 누구일까? 비정치인으로는 2014년 세월호 유가족인 단원고생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 씨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광화문광장에서 46일간 단식을 한 바 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세월호 유가족인 김영오 씨의 단식을 말리기 위해 열흘간 동조 단식을 시작했다.

 

국내 정치인 중에 가장 오랫동안 단식을 한 사람은 현애자 전 민주노동당 의원이다. 현 전 의원은 20076월에 제주 군사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27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있었던 단식투쟁은 민주화 전후로 살펴볼 수 있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오래됐으면서도 자주 언급되는 단식 투쟁은 1983년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이다. 당시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가택 연금 상태였던 김 전 대통령은 518일 학생, 종교인, 지식인의 석방과 복학, 복직, 언론 통폐합 백지화, 대통령 직선제 회복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23일간 단식이 이어졌고 결국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가 하나로 뭉쳐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됐다.

 

1990년에는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방자치제 시행과 내각제 개헌 포기 등을 요구하며 13일간 단식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요구는 1991년 지방의회 선거로 일부 실현됐고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벌어지며 그 뜻이 달성됐다.

 

 

출처: 시사오늘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투쟁수단으로 여겨졌던 단식의 일상화를 앞당긴 사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집권 중 뇌물수수와 12·12사태, 5·17 군사 반란 등의 혐의로 1995년 구속 중이던 전두환은 안양교도소에서 5공화국의 정통성을 지키겠다며 28일간 단식 농성을 벌였다. 동정보다는 국민의 비판이 더 거세지자 결국 단식을 중단했지만 단식 투쟁이 지녔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지방은 그 후 사라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정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뒤에는 단식의 양상이나 의미가 변했다. 90년대 이전 단식투쟁은 민주화를 위한 저항이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는 특정 정책에 대한 요구나 반대, 또는 자신의 소신을 밝히거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단식이 일상의 정치 활동에 다양하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정치인의 단식투쟁이 여론의 공감대와 호응을 얻기 위해선 합당한 명분과 실현 가능한 목표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단식이 국민적 호응을 얻은 이유는 그들에게 합당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정치적 힘이나 명분이 있을 때 단식 투쟁은 단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이다.

 

2018126일 연동형 비례제 도입을 요구하면서 12일간 단식 농성을 벌인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 두 사람의 투쟁은 명분에 힘입어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가동을 비교적 쉽게 끌어냈다. 20166월에는 박근혜 정부의 지방재정 개혁안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흘 동안 단식 농성을 벌였던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의 투쟁도 지방재정 독립이라는 명분에다가 전국적 관심 대상이 됨에 따라 대선주자급으로 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하지만 단식이 일상화되다시피 하면서 투쟁의 강도가 높아도 대부분은 별다른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19년에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대통령의 조해주 상임위원 임명에 반대한다며 릴레이 단식이라는 이름으로 소속 의원들이 돌아가며 5시간 30분씩 식사를 하지 않는 농성을 시작하자 웰빙 단식, 릴레이 식사 등의 조롱이 이어지기도 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의원들이 바쁠 때이기 때문에 취지를 같이 하면서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 조를 나눴다는 설명이었지만 기껏해야 점심이나 저녁을 평소보다 약간 늦게 먹는 데 불과해 단식이 아니라 릴레이 다이어트라는 조롱을 받았다. 뒤늦게 용어를 릴레이 단식에서 릴레이 농성이라고 바꿨지만 약자의 저항 및 최후의 항의 수단으로써 행해져 왔던 단식과 비교할 때 매우 이례적인 방식임은 분명하다.

 

또한, 2019년에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공수처법과 연동형 비례제 등의 폐기를 촉구하며 8일 동안 노숙 농성을 벌이다가 병원에 이송됐다. 황교안 대표는 다른 사례들과 달리 소금물조차 거부하여 복합 탈수 증세로 단백뇨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황교안 대표의 단식에 여야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황교안 대표는 단식 하루 전날 영양제를 맞고 단식을 시작해 황제 단식 중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단식투쟁의 외국 사례로는 인도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가 있다. 그는 1918년부터 1948년까지 십수 차례 단식투쟁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는 1948년 이슬람과 힌두교로 나뉘어 싸우는 두 종파의 화해를 주장하며 단식했다. 하지만 정치인이 대화 대신 단식 같은 비의회적 방법으로 문제를 풀려는 건 외국에선 찾기 힘든 일이다. 미국에서 의원들의 투쟁은 면책특권이 허용되는 의사당 안에서만 토론과 투표로 이뤄진다. 의사당 바깥으로 뛰어나가서 시위대와 합세하는 이른바 장외 투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시작한 단식투쟁은 대한민국 정치 발전에 큰 획을 그리며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물길을 바꿔놓은 투쟁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준 부끄러운 역사이며 고리타분한 구태정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투쟁 당사자들과 달리 대중들은 예전만큼 단식 투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극단적 투쟁이 아닌 대화와 소통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이 국민의 호응을 받기 더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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