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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Politics

12.12 쿠데타와 관련 인물들

by 누름돌 202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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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회와 군사반란

 

 

12.12 군사 반란군 다수는 '하나회' 소속이었다. 하나회는 전두환·노태우의 육사 11기에서 비롯된다. 육사 11기는 1951년 경남 진해에 육군사관학교가 정식 개교할 때 입학한 이들이다. 이전 10기까지는 단기 교육만 이수한 것과 달리, 11기부터는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았다. 11기 중 전두환·노태우 등 영남권 출신 위주 친목 모임이 하나회다.

 

그런데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서울대 교관 전두환이 후배 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끌어내 박정희의 호감을 사면서 날개를 달았다. 비밀 사조직 하나회는 박정희 비호 아래 인사 때마다 끌어주고 밀어줘 1979년 무렵엔 이미 요소요소에서 군을 장악했다.

 

전두환·노태우가 주도한 군사 반란은 1980년 5월 초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국회 해산, 비상 기구 설치 등을 뼈대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를 만들어 실행해 나간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참히 진압한 전두환 일당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정부를 장악하고 언론 통폐합과 정치활동 금지 등 반헌법적 조치를 밀어붙인다. 그해 8월16일 신군부의 압박에 굴복해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자 전두환은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전두환은 자신의 집권 기반이 안정됐다고 판단한 1981년 1월24일 비상계엄을 해제한다.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이들은 쿠데타 성공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의 검찰은 전두환·노태우가 12·12부터 5·18에 이르기까지 저지른 만행을 반란(수괴)죄로 기소해 유죄판결을 받아낸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2월 특별 사면을 결정하며 석방됐다.

 

 

 

 

1979년 12월12일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앞줄 왼쪽 다섯째);노태우(넷째) 등 신군부 주축 세력은 이튿날 보안사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5공화국전사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반란 세력의 쿠데타가 성공한 뒤 장태완과 가족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서빙고분실에 고초를 겪고, 강제 예편됐다. 6개월간 가택연금도 당했다. 아들의 처지에 실의에 빠진 그의 부친은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시다 1980년 세상을 떠났다. 2년 뒤엔 서울대생이던 장태완 사령관 아들이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아 의문사로 남았다. 일가족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장 전 사령관은 아들의 주검을 안고 차로 서울로 향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차 안에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 한달 동안 엄동설한의 강추위 속에서 낙동강의 매서운 강바람을 쐰 탓인지 전신은 돌덩이처럼 꽁꽁 얼어있었다. 나는 얼어있는 아들의 얼굴에다 내 얼굴을 부벼대면서 흐르는 눈물로 씻겨주며 입으로는 아들의 눈부터 빨아 녹였다.얼마 동안 빨다 보니 아들의 눈안에서 사탕만 한 모난 얼음 조각들이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아들놈이 마지막 흘린 눈물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삼켜버렸다. (…) 나는 흉한 자식의 시신을 제 어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가슴, 배꼽 등을 계속 빨아주면서 얼음장 같은 시신을 녹이다 보니 어느덧 차가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 차가 도착하자 온 집안 식구들이 대성통곡을 하며 뛰어나와 아들의 시신을 그의 공부방으로 운구해다 안치했다.”(‘12·12 쿠데타와 나’ 298쪽)

 

 

이후 전두환·노태우씨가 법의 심판을 받으며 ‘참군인’으로 재조명된 그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으로 제2의 인생을 이어갔다. 2010년 7월26일 79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2년 뒤 그의 아내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장태완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김오랑 소령

 

1979년 12월13일 새벽, 반란군에 가담한 3공수여단 10여명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한다며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실로 들이닥쳤다. 사령부에 전투 병력이 많지 않다 보니 정병주 사령관은 고립무원이었고,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만 곁을 지켰다. 김오랑 소령은 권총으로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엠(M)16 소총의 실탄을 여러발 맞고 숨졌다. 정병주 사령관도 왼팔에 총탄을 맞았다.

 

이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정병주 사령관은 강제 예편 뒤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다 행방불명됐다가 결국 1989년 3월 서울 교외 야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사인을 자살로 결론을 냈다. 그러나 당시 한겨레, 중앙일보 등 여러 언론이 ‘의문의 죽음’ 이라 전했다.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씨는 남편의 죽음 뒤 충격으로 시신경 마비가 되며 실명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1991년 6월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실족사로 결론을 내렸다. 김오랑 소령 본인은 1990년에야 중령으로 추서됐고, 2014년이 돼서야 보국훈장이 추서됐다.

 

김오랑

 

 

 

 

 장세동 대령

 

 

그는 전두환 정부에서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았다. 1985년에는 국가안전기획부장 자리에 임명됐으나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직을 내려놓는다. 이후 5공 시절 비리로 여러 차례 투옥됐으나 1997년 특별 사면으로 석방됐다. 200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해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

 

 

1996년 12·12 주범들에 대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그는 1979년 12월12일 저녁 7시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벌어진 총격전 소리에 놀라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했다가 이후 합동참모본부 작전국장의 여의도 소재 아파트, 한미연합사령부를 떠돌며 몸을 숨긴다.

 

이후 반란군 핵심 전력인 1공수특전여단이 육군본부로 몰려가던 이날 자정께 전군에 병력 동원 중단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반란군을 막기 위해 출동했던 9공수특전여단이 부대로 복귀한다. 신군부 시각이 담긴 ‘제5공화국전(前)사’를 보면 노 장관은 신군부를 진압하려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가만히 있어! 시키는 대로 해. 절대 충돌하지 말라”고도 지시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유혈충돌을 피하려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쿠데타를 용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군사 반란이 성공한 직후인 1979년 12월14일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981년 공기업인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을 거쳐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자리를 꿰찼고, 그 이듬해엔 한국비료공업협회 회장에 올랐다. 노 장관은 1988년 62살에 퇴임했다. 이후 1991년에는 보수 성향의 관변단체 자유총연맹 총재로 선출됐다.

 

슬하에는 6명의 자녀를 뒀다. 딸 노경선씨가 재벌가인 지에스(GS)그룹의 넷째 아들 허명수 지에스건설 부회장과 결혼했다. 노 전 장관은 2019년 9월25일 93살로 사망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노재현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공관에서 하나회 일당에 불법 체포당한 뒤 육군 지휘계통에 따라 진압 책임을 지게 됐지만, 우유부단한 처신으로 반란군 승리에 도움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반란군이 육군 지휘본부가 대피했던 수도경비사령부를 점령할 때 무장해제당해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다.

 

그러나 이후 승진가도를 달렸다. 윤 중장은 1979년 12월24일 육군 제1군사령관에 취임했고, 이듬해 5월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거쳐 1982년엔 제23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퇴임 후인 1987년 4월 공기업인 한국석유개발공사 이사장을, 같은해 10월 대한방직협회 회장 자리를 맡았다. 이후에도 대한교육보험 고문, 현대정공 고문을 거쳐 자유민주연합 특임위원 등을 지냈다. 2017년 11월 6일 92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윤성민

 

 

 허화평 대령

 

 

반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허 대령은 12·12 사태 실무자로, 쿠데타 성공 이후 전두환씨의 최측근으로 승승장구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5공화국의 설계자’로 불리기까지 했다.

 

1980년 9월 전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대령이던 그는 준장으로 예편한 뒤 청와대비서실의 보좌관으로 임명된다. 기존에 없던 직위로, 전씨가 새로 만든 자리였다.

 

그는 이후 청와대비서실 산하 정무제1수석비서관 등을 지내며 실세로 권력을 누렸지만 1983년 돌연 미국행을 택했다. 당시 언론들은 내부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곳에서 헤리티지 연구소 객원연구원과 수석연구원을 지내다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귀국해 현대사회연구소(현 미래한국재단) 소장으로 부임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이후 김영삼 대통령 취임 뒤에 치러진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도 당선됐다. 그러나 이후 12·12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가 이후 사면됐다.

 

현재 86살인 그는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미완의 기적’ ‘숨결이 혁명 될 때’ ‘고독하지만’ 등의 책을 썼다.

 

허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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